나는 47년생이다. 인생을 안다고 하기는 이르고 급변하는 21세기를 따라잡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다. 그동안 전자, 소프트웨어개발, 잡지출판, 테마파크 등의 사업을 해왔지만 학원에 가장 애착을 갖고 있다.
첫 사업인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르친다는 보람 때문이다. 패기만만한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길 기대하며 컴퓨터 학원을 중심으로 이글을 써나가고자 한다.
학창시절 우리나라는 참으로 가난했다.
잘 살아보는게 모든 이의 꿈이었듯 나또한 철들기 시작한 후 늘 성공한 사업가를 꿈꾸며 살아왔다. 대학 4학년이던 해 가을, 우연히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컴퓨터를 처음 접하게 됐다. 컴퓨터라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없던 내게 그 일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것이 성공적인 사업을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랬다.
자본도, 경험도, 그렇다고 특별히 도움 받을 곳도 없던 내게 아직 미지의 세계인 컴퓨터 분야라면 어려운 경쟁상대를 피해 쉽게 사업 기초를 닦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날로 컴퓨터 배우는 일에 열중했다. 다행히 적성도 잘 맞았고 사업가의 꿈을 이뤄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대학을 졸업한 70년 4월 아버님이 주신 적은 돈으로 컴퓨터 학원을 시작했다.
대학생들이 많은 이화여대 앞에 30평 남짓 사무실을 임대해 3등분 하고 사무실, 교실, 그리고 군용침대를 놓은 숙소로 사용했다.
컴퓨터 분야 첫 사업으로 학원을 시작한 이유는 당시 컴퓨터의 상업적 이용사례가 없어 사업모델을 찾을 수 도 없었지만 머지않아 컴퓨터는 사용될 것이고 그렇다면 전문 인력이 양성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가 저지른 엄청난 실수였다. 컴퓨터를 아는 이도 경쟁자도 별로 없을 것이라며, 당시로는 변두리였던 이대 부근에 달랑 교실 한개 만들어 놓고 교문 앞에서 전단지를 뿌리는 것으로 학생들을 모집하려 했던 돈키호테식 계획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내가 컴퓨터를 배우기 전부터 이미 다른 이들이 서울의 중심가 빌딩에 큰 자본을 투자해 학원을 개설하고 신문에 광고를 내고 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인사들이었지만 나는 내세울 것 없는 풋내기였다.
늑대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꼴이었다. 전단지 효과는 없었다. 주위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손을 떼라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나는 인생에 처음 닥친 시련을 극복해 보고 싶었다. 먼 길을 가다보면 어려움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만 되가는 것도 좋지않다. 인생은 시련을 통해 성숙하고 어려움을 통해 발전한다.
젊은날의 고생은 금을 주고도 산다고 했던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하는 앞날이 두려움의 대상일지라도 도전하지 않는다면 젊음이 아니다.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 아직은 그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을 뿐이지."
"나는 지금 경쟁 상대보다 부족하다."
그런데 그게 꼭 약점인가? 그래서 더 좋아질 수는 없는가?"
예나 지금이나 늘 잊지 않는 두 가지 생각이다.
처음 학원 문을 열었을 때 내가 상대보다 부족한 것은 무엇보다도 신문에 광고를 하고 싶어도 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대학가를 찾아다니며 말로 설명하면 어떨까?
컴퓨터가 어떤 것이고 배우면 무슨 이익이 있는지를 직접 이해시키고 알린다면 되지 않겠는가?
고생은 되겠지만 해 볼만 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날부터 대학생을 상대로 컴퓨터를 설명하고 다녔다. 자존심 상하는 일도 있었지만 관심 있는 학생들이 단체로 부탁하는 일이 생겼고 학과별로 특강을 요청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직접 마주쳐 보니 컴퓨터에 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함을 알 수 있었다.
좀 더 빠른 시간 내에 컴퓨터의 중요성을 알리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대학에서 컴퓨터 학술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의 강연회는 저명인사들이나 초청받는 자리인데 나이도 어리고 내세울게 없었던 내게 기회가 올 리가 없었다.
연사가 될 수 있는 여건을 먼저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컴퓨터프로그래머협회'를 만들기도 했다. 협회를 만들려면 먼저 회원을 모은 후 회장을 추대 하는 게 순서이겠지만 그러면 시간이 많이 걸렸다.
순서를 조금 바꿔 회장을 모신 후 그 분의 도움으로 회원을 모으기로 했다. 다행이도 과학기술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컴퓨터 분야의 발전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시던 문영철 선생께서 나의 무례함을 오히려 젊은이의 열정으로 칭찬해 주시며 쾌히 승낙해 주셨다.
회장이 추대되자 그 분을 따르던 많은 이들이 회원에 가입했고 얼마 되지 않아 협회가 출범했다. 나는 부회장으로 선출돼 강연회 연사로 초대받게 되었다.
연세대에서의 첫 강연회는 대성공이어서 이후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어떤 날은 하루에 세 번 강연을 하기도 했다. 한국일도ㆍ중앙일보 등에 연재기사를 쓰고 컴퓨터 전문서적을 집필하는 일이 그때부터 시작됐다.
어느덧 나는 유명인사가 됐으며 컴퓨터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학원으로 몰렸다.
그토록 대단해 보였던 경쟁 학원들은 서서히 문을 닫거나 다른 사람에게 인수됐다.
돌이켜 보면 광고비용이 없었던 게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 상대보다 부족한 것이 약점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유 있는 사람은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것이 큰 약점이 된다. 만약 경쟁학원처럼 좋은 시설로 광고를 할 수 있었다면 시장을 나누어 가지며 편할 수는 있었겠지만 새로운 시장을 확장시키며 기회를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안 되는 일이라고 미리 단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운 것이며 공이 바닥에 닿으면 튀어오를 일만 남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성공은 도전하는 자의 것이다.
인생살이도 그렇지만 사업도 처음 조그만 것을 이룰 때까지가 정말 힘들다.
그러나 이후 좀 더 이익을 올리는 것은 덜 힘들고 더 많은 이익을 내기는 훨씬 쉽다. 나 역시 초기의 고생을 벗어나자 규모가 급증하기 시작해 74년에는 경쟁학원을 인수하게 됐다.
그러나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인수한 학원을 기존 학원과 같은 장소로 합칠 것인가 아니면 이름을 '중앙'으로 통일하되 분원 형태로 다른 장소에서 운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지금 보면 하찮은 문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만 해도 학원이 본원과 분원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강사들이 교육할 경우 분원의 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너무나 뿌리 깊었다. 누구도 분원을 두는 모험을 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유명한 학원도 수천의 학생을 교육하는 수준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전국을 커버할 수 있는 대규모 교육 기관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만 규모의 경제로 고가의 실습 장비를 설치할 수 있고 수요가 적어 채산성을 맞출 수는 없지만 꼭 필요한 특수 분야의 전문가도 양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분원을 만들어 남들이 아직 해보지 않은 길을 가야만 했다.
분원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본원과 분원의 교육 수준이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모든 과목의 교안을 통일해야 했다. 교육 내용을 시간대로 나눠 세분하고 설명 순서, 예제 모든 과목의 교안을 통일해야 했다. 교육 내용을 시간대로 나눠 세분하고 설명 순서, 예제, 심지어는 칠판에 판서는 위치까지 토의를 거쳐 통일했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본원에서 교육받던 학생이 중간에 분원으로 이적해도 그대로 연속될 수 있었고 본원과 분원의 차이는 없어졌다. 이후 79년까지 서울의 종로, 영등포, 강남과 부산, 대전 등 지방에도 분원을 설립해 전국 단위의 대규모 학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선진국들도 초기에는 요원의 절대 부족으로 컴퓨터 활용이 원활하지 못했는데 그 원인은 대학의 컴퓨터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역시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대학에서 컴퓨터 교육이 본격화됐지만 다행히도 외국에는 없는 학원이라는 특별한 교육 제도가 있어 일찍부터 전문 요원이 양성됐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70년대 말에도 요원 부족에 따른 큰 어려움 없이 빠른 속도로 전산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으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IT강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
학원이라 하면 보통 과외 학원을 떠올리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양한 기술계 학원들은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인력을 키워내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컴퓨터처럼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빠른 분야에서는 학원 교육의 진가가 더 잘 나타난다.
대학은 수시로 발전하는 기술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할 뿐 아니라 변화에 대한 대응도 늦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학원은 신기술을 습득한 인재를 신속하게 투입해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학원은 이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마는 냉엄한 시장경제의 구도에 들어 있다.
우리나라가 IT강국으로 불리는 지금도 그렇지만 컴퓨터 도입 초창기 때는 선진국의 기술 변화와 어디에 어떻게 이용되어지는가를 아는 게 꼭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76년에 국내 최초의 컴퓨터 전문잡지인 '월간 컴퓨터'를 창간했다.
컴퓨터 전문잡지의 발행은 경제적 부담은 있었지만 새로운 교육 과정을 더 빠르게 개발하는데 도움을 줘 학원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단기 교육에 의한 초급요원 양성으로 시작됐던 것이 교육 기간도 6개월, 8개월로 점차 길어졌고 고급 기술자를 양성할 수 있는 데까지 발전하게 됐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점점 어려워지는 강의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어진 수강생들이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이다.
운영상에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고급 기술자 양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학생들의 이해도를 향상시켜 진급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컴퓨터 공부는 마치 수학과 같아 앞에서 배운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은 전혀 알 수 없어 하루만 결석해도 따라가기 힘든 특징이 있다. 그런데도 매월 수강생으로부터 수강료를 받아야 하는 학원은 수강생을 다음 과정으로 진급시키기 위해 학생들의 비위를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학생 스스로 노력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다음 과정으로 진급을 완전히 반대로 하기로 했다. 수시로 시험을 봐 성적이 나쁘면 제적했으며 숙제를 안 해 오거나 수업태도가 나빠도 제적하기로 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학생은 가르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처음에는 불만도 항의도 많았으나 실력이 점차 향상되기 시작하자 자신이 생긴 수강생들이 고급과정까지 도전하게 됐고 진급률은 놀랍게 향상됐다. 고급 과정의 수익성도 몰라보게 개선됐다.
그 후 엄격한 교육은 우리 학원의 전통이 됐으며 우수 인재를 배출하는 명문 교육기관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고급 과정의 운영이 본 궤도에 오르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때까지 사용하던 한국과학 기술연구소의 컴퓨터 터미널만으로는 학생들에게 충분한 실습 기회를 주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학생 실습용 대형 컴퓨터를 도입할 필요가 생겼지만 문제는 학원이 그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었다. 수십억 원의 도입 비용도 그렇지만 각 지역에 분포된 학원에 별도의 전용회선으로 터미널을 설치해야 했으며 수시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 시켜야 하고 먼지 없는 방에 온도,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야 하는 등 유지, 관리 비용도 큰 문제였다.
학원 규모가 더 커진 후에 도입하는 것이 순서겠지만 순서대로 하는 것이야 누구는 못하겠는가.
규모가 커질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형 컴퓨터 도입이 학원의 규모를 한 단계 더 끌어 올릴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는 판단한 나는 81년 과잉 투자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형 컴퓨터를 도입했다. 여러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다행히 그 후 PC의 보급으로 때맞춰 일어난 컴퓨터 붐과 함께 학원의 규모는 예상보다 더 빨리 성장해 국내 컴퓨터 전문요원 양성을 거의 독점하는 계기가 됐다.
사업은 조심성도 있어야 하지만 과감히 도전하는 결단은 더욱 필요하다.
토끼처럼 조심하되 때로는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주어진 조건 중에서 최선의 선택 보다는 남이 해 보지 않은 새 선택사항을 만들어 내는 쪽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한 언론사에 매년 초대되는 '명사미술회'의 멤버이기도 한데 '하늘은 파랗다'라는 식의 지식이나 선입견이 오히려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큰 방해가 됨을 느낀다.
그림을 그리는데 하늘색이 빨강이면 어떻고 노랑 또는 초록이면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특히 사업가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거나 어려움을 타개하려 할 때는 엉뚱한 공상을 통해 당연하다고 보여 지는 일의 순서나 상식을 뛰어 넘어야 한다.
지난 90년 창립 20주년을 맞은 중앙정보처리학원은 국내 IT산업 규모로 볼 때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잘되는 기업도 다운사이징 구호를 외치며 비용을 절감하는 이유는 더 많이 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다.
기업이 새로운 도전에 뒤떨어지고 느리면 발상의 전환으로 대응해 오는 경쟁자에 의해 순식간에 도태되어 버린다. 전산전문요원 양성만으로는 규모 확대 한계에 도달했으니 손쉽게 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 컴퓨터의 기초 이용분야로 범위를 넓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 분야는 이미 동네의 소형학원들이 담당하고 있어 우리가 뛰어들기는 도덕적으로도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가능하면 아직 남이 하지 않는 새로운 분야를 찾아내기로 했는데 컴퓨터 디자인 교육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마침 손으로 하던 디자인 작업이 컴퓨터 그래픽 작업으로 조금씩 바뀌던 때였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교육을 하려면 마이크로 급의 컴퓨터와 각종 소프트웨어, 고가의 컴퓨터 편집장비 등 대규모 시설투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직 때가 아니라거나 너무 위험하니 시설투자는 적고 모집은 쉬운 기초교육만 시작 한 뒤에 시간을 가지고 확장하는 것이 좋다는 등 여러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유난히 낙후돼 있던 우리의 디자인 산업을 위해 누군가는 늦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이며 다수의 초급자보다는 소수의 고급 인재가 사회에서 절실히 요구 되는 현실에 비춰 나는 모든 의견을 물리치고 과감한 시설투자로 고급과정까지 한꺼번에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중앙정보처리학원이라는 후광도 있었지만 놀랄 정도의 뜨거운 호응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젊은 디자인 전공 교수들이 직접 학원에 나와 공부하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분들께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고 싶다.
컴퓨터아트학원은 그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7개의 분원을 개설했고 우리나라 디자인산업이 한 단계 향상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중앙정보처리학원과 중앙컴퓨터아트학원을 설립해 큰 성공을 거뒀고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36년간 한 번도 1등을 내주지 않은 자만심이 미래의 위험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긴장하고 있다. 인터넷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지금까지의 오프라인 교육의 퇴조를 가져오고 머지않아 E러닝이 미래 교육시장의 승부를 결정할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오프라인 교육의 규모를 점차 축소하면서 E러닝 개발에 힘쓰고 있다.
컴퓨터로 컴퓨터를 가르치겠다는 것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최고의 콘텐츠를 만들어 이제는 세계시장으로 나아가고 싶다.
나의 그림친구인 한국폴라의 이청승 회장은 그의 저서 '본능경영'에서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배고픈 놈이 이긴다고 하면서 바닥을 딛고 일어서라고 말한다.
신경제의 거대한 변화 앞에선 우리는 누구나 망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밑바닥 삼아 새로운 도전에 나서야 한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좋은 회사에 다니고 싶겠지만 나 역시도 좋은 회사를 운영하고 싶다. 그러나 좋은 회사라는 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서로 합심해 만들어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꿈꾸는 좋은 회사는 첫째 충분한 이익을 내야하고 그 이익은 구성원들과 적절히 나누어야 한다. 적자나는 회사에서 봉급 올리라고 데모하는 것도 나쁘지만 많은 이익을 내는데도 직원들의 복리 후생에 게으른 회사는 더 나쁘다.
둘째 직원 상호간에 화목해야 한다. 최소한 꼴 보기 싫은 사람은 없어야 한다. 부처님도 생로병사와 함께 보기 싫은 사람과 만나는 일이 인생의 고통이라 하셨다. 나는 공부보다는 친구 만나는 재미로 학교를 다녔다.
회사에 돈만 벌러 다닌다면 얼마나 삭막한가. 동료 만나는 재미도 있다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나는 직원에게 군림하려는 간부를 매우 싫어한다. 엄격함 보다는 배려를, 지배자보다는 지도자를 원한다.
셋째, 사회에 기여하는 회사라야 한다. 불우이웃 돕기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회사가 제공하는 상품이나 서비스 등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게 먼저이다. 물론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기업이라서 이익을 줄이거나 포기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나의 이러한 고집은 때때로 사업가로서는 무모하다 싶은 결정을 할 일도 많았다. 나는 매체에 관심이 많아 '월간 컴퓨터'를 비롯한 전문지와 '쉬즈'. '쉬즈브라이드', '오픈'등의 여성 월간지, 그리고 대학생신문 '캠퍼스라이프'등을 발행했다.
컴퓨터게임 산업이 시작되던 90년 '게임월드'라는 월간지를 창간한 일이 있었다. 최초의 게임 전문지라는 이점도 있어 쉽게 성공했지만 뒤이어 비슷한 경쟁지들이 생겨났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게임을 주로 다루면서 청소년 층 을 파고들었다.
'게임월드'의 판매 부수는 현저히 줄었다. 우리도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사회에 독이 될 지도 모르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성공한 잡지지만 폐간을 결정했고 직원들도 잘 따라 줬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92년 여성월간지 '오픈'과 '쉬즈'를 창간했다. '오픈'은 감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쉬즈'는 패기발랄한 아름다운 젊은 여성을 목표로 삼았다.
여성지는 폭로나 가십 기사가 없으면 팔리지 않는다는 인식이 팽배할 때 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도 성공하는 여성지를 만들고 싶었다.
'오픈'은 내용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큰 손실을 내고 폐간했지만 '쉬즈'는 여성지의 한 획을 긋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학원이 청소년 장학이나 인재 양성을 위한 무료 교육에 힘쓴 점, 그리고 고급 기술자 양성을 위해 손실을 무릅쓰고 대규모 투자를 진행한 것들이 오히려 전국 13개의 분원을 가진 국내 최대의 명문 학원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확신한다.
나는 교육자로서의 영예인 서울교육대상을 수상하고 20세기를 빛낸 학원인으로 선정된 것을 큰 자랑으로 생각한다. 또 사업 인생의 많은 부분을 교육과 함께 할 수 있었음을 감사한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씨앗을 뿌리고는 그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는 기다림이 행복하다.
나는 사업가가 아닌 교육자로서 기억되어지고 싶다.
꿈꾸는 사람은 아름답다. 성공하고 싶거든 꿈을 가져라. 그 꿈이 큰 사업가나 최고의 예술가가 되는 원대한 꿈이든 우수한 성적을 받거나 진급하고 싶다는 바람이든 상상하기를 멈추지 말라. 만약 화목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는 절실한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말 한마디라도 다정해질 것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쓸 데 없는 다툼을 피할 것이며 행복한 가정이 찾아 올 것이다.
이루고 싶은 절실한 소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자신을 이끌어 준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세 번 정도는 운이 찾아오고 그 중 한 번이라도 그 운을 잡을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세 번의 운이 찾아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할지 모르지만 한 번이라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오직 꿈을 가진 사람만이 다가온 그것이 좋은 기회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말한다. " 나는 늘 그렇게 되고 싶다고 꿈꿔 왔고 이상하게도 운이 따라주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은 "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 고 했다. 정말 백 번 옳은 말이다. 크건 작건 세상 누구에게나 참기 힘든 어려움은 반드시 닥치게 마련이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만 되어가는 것도 좋지 않다. 시련은 용기를 알게 하고 성공의 방법을 가르쳐 준다.
나는 1980년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스캐너로 전자 색분해 필름을 제작해 주는 회사를 설립했다. 경쟁자가 없는 새로운 분야였기에 쉽게 회사의 기반을 잡았다. 자금에 여유가 생기자 당시 국내에 수입되기 시작하던 PC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회사의 이름도 중앙전자(주)로 바꾸고 컴퓨터 사업부를 신설하고 PC 제작에 뛰어들었는데 나는 그 일로 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경쟁 상대는 '삼보 컴퓨터'였는데 우리는 경쟁사보다 더 먼저 더 많은 자본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시작했음에도 결과는 나의 완패였다. 우리는 한국형 도스(KDOS)로 개발해 상품화하는 한편 많은 신기술을 개발해 전자전람회에 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가장 앞선 기술을 선보였다. 그러나 상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지나친 욕심으로 대중성 없는 작품을 만든 꼴이 됐다. 최고의 PC를 만들었다는 흥분은 잠시였고 너무 값비싼 우리 제품은 몇 대 팔아보지도 못하고 생산을 포기했으며 회사 사옥까지 정리해야 했다.
그러나 그 일로 얻어진 기술과 특허는 몇 년 후 중앙전자(주) 성공작인 공장 자동화용 컴퓨터를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그 후 그 때의 시련은 나의 사업 인생에 큰 교육이 됐으며 앞으로 닥칠 수 있는 더 큰 실패를 예방해 주는 스승이 됐다. 시련이 닥치거든 그것이 인생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과정이라 받아들이고 오히려 장래에 도움이 될 좋은 공부라 생각하라.
그리고 도전하라. 사람은 시련을 통해서 성숙하고 어려움을 통해 발전한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일수록 집 안에 배경이 없어서라거나 재수가 없었다거나 심지어는 사회 때문이라는 둥 안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많이도 생각해 낸다. 불행하다고 말 하는 사람은 스스로 불행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안 되는 일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성공은 없다.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라고 다짐하며 부정보다는 긍정으로, 화내고 걱정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축내지 말고 인생은 언제나 새로운 문제에 부딪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의 연속임을 잊지 말라.
성공하려는 사람일수록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을 품은 복어도 독만 빼내면 최고의 요리가 되듯 성질이 괴팍한 사람도 재주만 써먹는다면 좋은 협조자가 될 수 있다.